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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폭 피폭 고통의 삶 속에 피어난 `호국화`

"몸을 가누기 어려울 때가 잦아 작품을 만드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유공자와 참전용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25일. 한국전쟁 발발 62주년이 되던 날 오후 5시, 경남은행 본점 1층 KNB 아트갤러리에서 특별초대전이 열렸다. 장영준(83) 화백 작품이, 특히 그가 1989년부터 10여 년간 공을 쏟아부어 완성한 150호(350×1915㎝) 크기 '호국화'가 내걸려 이날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돌가루로 꽃피운 대한민국 훈장 '호국화'
꽃을 담는 꽃병에 대한민국 훈장이 주렁주렁 열린 '호국화'에 대해 장 화백은 "10년에 걸쳐 완성했어요. 한국에 있는 훈장은 죄다 모아놨죠.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참전 용사의 호국정신을 되새기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작품 속에는 10여년이라는 세월이 녹아있다. 그의 인생 83년에서 10년이라는 세월.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연이 얽혀있다.

돌가루 빠아 아교로 섞어 작업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됐죠. 훈장에 대한 자료는 물론 작품에 사용되는 돌가루도 쉽게 채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유공자와 참전용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심했죠."


▲인터뷰하는 장영준 화백.
곱디고운 돌가루를 재료 삼아 완성한 '호국화'를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빛에 따라 은은히 반짝이는 것이 진정 돌가루인가, 장 화백의 혼이라도 담긴 것일까, 눈이 의심될 정도였다.

흔히 장 화백을 두고 '돌에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화가'라고들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장 화백의 작품은 손으로 만지고 긁어도 작품손상이 전혀 없다. '돌' 때문이다. 1940~50년대 그는 물감 살 돈이 없어 빨간색 머큐로크롬과 황토, 먹물로 그림을 곧잘 그렸고 어느 순간 장 화백의 눈에 형형색색의 돌가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채집한 돌을 곱디곱게 갈아 아교나 특수접착제를 섞어 작업했고 주로 주술적·토속적 신앙을 작품에 담았다.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알맹이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 것'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 화백. 그는 30여 년 동안 돌가루를 이용해 부와 풍요를 상징하는 부귀화(富貴花·모란꽃)를 즐겨 그렸다. 예전부터 '부귀화'는 부자가 되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아 부적과 같은 주술적 역할을 했다.


▲특별초대전을 감상하는 관람객.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들어봤나요?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인데 아무리 꽃이 예쁘고 화려해도 얼마 못 가요. 관람객이 작품 '화무십일홍'을 보고 '인생은 덧없다'는 것을 느꼈으면 합니다."


▲경남은행 본점에서 열린 특별초대전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 장영준 화백(가운데 휠체어 타고 있는 사람).
그의 말마따나 자료 수집하고, 돌가루 모으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지만, 그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어 작업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고통의 삶 남겨

그는 지난 2001년 10월 골수형성이상증후군(골수 내 혈액세포 이상으로 생기는 병)을 진단받은 후 병마와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그의 예술혼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45년으로 돌아가보자.

미국 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 16세 소년은 아버지를 찾아 시내로 향했다. 시내 전체는 새까만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피부가 벗겨진 사람들 몸에서는 기름이 흘렀다. 다행히 아버지는 산에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3개월 후 아버지는 소년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마산으로 돌아왔으나 원폭 후유증인 폐 이상으로 사망했다.

16세 소년도 67년이 흐른 지금 골수형성이상증후군으로 백혈구가 감소하는 병과 싸우고 있다.


▲인터뷰 중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에 빠진 장 화백.
몸은 통통 붓고 코에서는 피가 곧잘 나고 호흡은 거칠다. 주삿바늘 흉터가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면 입원과 퇴원을 몇 년째 반복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오롯이 작품활동에 집중할 수 없는 까닭이다.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요. 고열과 몸살 병원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를 이처럼 고통에 빠뜨린 나가사키 원폭 투하. 장 화백과 그 가족이 살아온 억겁의 세월은 한 개인의 상처가 아니다. 7만 명이 넘는 원폭피해자가 생존해있고, 성 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여성과 전쟁터로 탄광으로 끌려간 수많은 사람들이 온 생애를 다 걸고 증언하고 있다. 이 땅에 드리워진 침략의 상처가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노력보다 고통의 절규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장 화백의 고통은 이 땅에 사는 모두의 상처이지 않을까.

"당시에는 원자폭탄이 뭔지 알기나 하나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시내를 돌아다녔으니 방사능으로 목욕한 셈입니다. 이후 군대에 갔는데 코피가 터지고, 잇몸에 고름이 생기고, 시력이 나빠지더군요. 그러다 30살 넘으니 증세가 없다가, 40살 이후 다시 이상이 생겨 지금까지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장 화백은 1948년 경북 특별경찰대에 입대해 근무 중 한국전쟁을 겪었고 1996년 보훈대상자로 인정받아 훈장도 받았다.


▲훈장에 대해 설명하는 장 화백.
그가 원폭피해자인 사실을 일본정부에 꾸준히 제기했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네 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모두 무위에 그쳤다. '증인을 찾아 피폭 관계를 입증해야 한다'는 이유로 '각하'된 것. 그런 그에게 몇 달 전 일본 시민단체 대표와 변호사, 신문기자가 그를 찾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7월 17일이면 이번 소송 결과가 나온다.

"일본 정부에 원폭 피해자 사실 인정 받고파"

장 화백은 재판정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잘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을 연신 했다. 장 화백은 이번 소송 의미에 대해 "나 개인적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받는다는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생활 또한 넉넉지 않아 병원비 부담이 큰 장 화백은 "결과가 좋게 나오면 일본 병원에서 무상으로 진료받을 수 있다. 아무 도움 주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부도 이러한 결과를 참고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했다.

"예술가는 항상 만족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전시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작품을 작업실에 쳐 밖아 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송인식(왼쪽에서 두번째) 관장과 함께 한 장 화백.
여는 행사 때 만난 장 화백은 경남은행 관계자와 송인식 동서화랑 관장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에 송 관장은 "사랑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시는 8월 31일까지, 일본 재판 결과 통보일은 7월 17일.

원폭 피폭 고통의 삶 속에 피어난 `호국화`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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